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수요일의 심리학_7기] 슬픔 치유

수요심리학 7기 첫 번째 책(2월) ‘슬픔의 위안’을 마쳤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묻어둔 슬픔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 잃는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평범한 것이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생활이라는 껍질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위안 p34 인생은 사소한 것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을 비틀어 버린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잘라낸 뒤 그곳을 허무 대신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고통은 엄연한 실재다.

그래서 고통은 공간을 채운다.

(중략) 하지만 슬픔은 저항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다.

슬픔의 위안,p36 그래서 슬픔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평범하고 사소한 것부터 예고도 없이 불쑥 파고드는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외면하고 회피했습니다.

인생의 사소한 모든 곳에 베이고 있는 빈자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망설였습니다.

슬픔은 그런 것이다라는 말이 위로가 됐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슬픔이라는 감정이 원래 그래.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1

© Cool Pubilc Domains, 출처 OGQ 가끔씩은 집단이 슬픔에 빠진 사람을 잠시 내버려두는 게 최선일 때도 있다그게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몰라.슬픔의 위안 p44 위로하러 오는 연락이 만나자는 말이 싫었습니다.

그냥 피하고 싶었고,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만 있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곤 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 이외는 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이 밀려올 때는 그럴 때가 있었어요.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2

©lazybonesaustralia, 출처 Unsplash 지킴이는 대장장이가 쇠를 단련할 때 쓰는 도구다.

(중략) 슬픔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그들을 싸게 억제한다.

(서양속담, 행복속담)(중략) 이런 순간은 스스로 너무 잘 견디고 있다고 자랑할 때 불쑥 찾아와 서는 당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이 때문에 이런 순간이 바로 모르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은 자신을 바보처럼 바보처럼 풍자만화 속의 인물처럼 느끼게 된다.

슬픔의 위로 p66 물론 하늘은 당신이 정확히 언제 슬픔에 빠질지, 정확히 언제 떨어지는 수종을 피하며 살아갈지 모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또 같은 일을 겪음으로써 그래서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위로 가서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결고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슬픔의 위로 78 몰 지금은괜찮다고여기는어느순간한대를맞은느낌으로슬픔이훅올라오는순간이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무방비로 당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여러 번의 수비(守)를 맞이하면서 슬픔을 만나게 됩니다.

슬픔의 무게를 체감하게 되죠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3

© jupp, 출처 Unsplash 슬픔은 시작이다.

(중략) 슬픔은 분명히 시작이지만, 괴롭다, 골치 아픈 것은 당신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정직해지는 것이다.

” 여기서 모든 것은 당신과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 과거 그와 함께 했던 것과 그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을 말한다.

슬픔의 위로, p81 슬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사라져 버린, 있던 것이 없어진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이것저것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직면한 슬픔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연습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4

© tannahims, 출처 Unsplas h 오랫동안 슬픔에 젖어 지내는 사람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방어적 진실여과기의 단점이다.

(중략) 슬픔은 진실여과기를 거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실여과기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는 방식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설령 자신에게 분노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슬픔의 위안 p84 “그러니 슬픔을 말하라.”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슬픔을 말하라. 하늘 뒤뜰이나 샤워 장막에서 슬픔을 말하라. 홀로 있는 차 안에서, 숲 속을 걸으며 슬픔을 큰 소리로 외쳐라.이것이 슬픔의 토로다.

슬픔의 위로, p89,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슬픔을 마주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누구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마음속에 간직해 둔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나 나무에나 베란다에 놓인 화초들에나 표현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큰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냥 음미해도 됩니다.

그래도 슬픔은 토로됩니다.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5

© nate_dumlao, 출처 Unspl ash 수치심은 사별의 슬픔이 갖는 여러 측면 중 사람들이 가장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자연스레 겪게 될 불가피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수치심을 느꼈다.

슬픔의 위안 p101 죽음과 죽음의 과정에서 은밀하게 얽혀 있는 이런 수치심 때문에 당신은 금기의 섬에 유폐된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슬픔의 위안 p107 슬픔을 마주한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슬픔을 마주할 때까지는. 죽음이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금기시되는 상황이 수치심을 자극합니다.

뭔가 잘못된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잘못된 상황에 놓인 것도 수치심을 느끼게 합니다.

불편한 감정이 수치심이라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렸어요.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6

© caleb_woods, 출처 Unspl ash 슬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 고통스러운 작업이 지루한 사이에 숨을 고르고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인은 바로 그 휴식, 그것도 건강한 휴식이 될 것이다.

슬픔의 위로, p122 사별의 슬픔엔 치유는 없다사람은 사라지고 그 사실은 결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들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자신이 직면한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생존을 위한 도구라면 무엇이든 새롭게 직면한 현실과 싸우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슬픔의 위안 p153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7

© kilyan_s, 출처 Unsplash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유머는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머는 만들어 낼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슬픔의 위로, p155 슬픔은 당신을 눈에 띄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본의 아니게 우주의 중심으로 던져진다.

(중략) 비극이라는 너무 큰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면 평범한 크기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중요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자신이, 인간이, 그저 내가 간절해지고 싶다.

슬픔의 위로, p181 슬픔도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서 너무 많은 진실을 외면한다.

슬픔이 주는 작은 선물 중 하나는 슬픔을 경험한 뒤 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슬픔의 위로, p183슬픔을 마주할 뿐 아니라 부인이 휴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안심입니다.

그리고 슬픔을 겪고 나면 그냥 제가 간절해지고 싶다는 말도 위로가 돼요.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8

© markusspiske, 출처 Uns plash 이런 충동은 정상적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중돼야 한다.

피셔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이 갈망에는 다른 모든 물리현상처럼 항상 바람직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중략) 먹는 것, 성적 욕망을 품는 것, 사랑하는 것, 탐닉하는 것 이런 것들은 육체의 본능이자 영혼의 본능이기도 하다.

슬픔의 위안 p189 슬픔을 겪을 때 슬픔만이 아닙니다 슬퍼지면 먹는 것도 잠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책에서 지적했듯이 탐닉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욕망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거죠. 당황하실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슬퍼하는 사람이 그래도 되겠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리고 부끄러웠어요

이런 충동은 정상일 뿐만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눈물만 흘리면서 음식을 전폐해야 하지 않겠어요? 죽음을 경험한 우리의 본능은 삶의 욕구를 일깨워줍니다.

죽음과 마주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겁니다.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9

©Rita E, 출처 Pixabay 냉소는 분노를 방출하는 하나의 방법이다속이 시원하면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무해하다.

또 분노를 일반화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받아들여 철학의 경지에 올려놓는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분노로 크리스마스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노려볼 수도 있다.

슬픔의 위안 p208 늘 기대어 울상이 아니다가끔 기대어 불쾌한 말을 하는 어깨도 필요하다.

그래야 속이 시원하니까.슬픔의 위안, p209 슬픔은 흐느끼고 약해질 뿐만 아니라 분노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만이 슬픔의 표현은 아닙니다.

분노와 냉소, 싫은 말을 내뱉는 것이 슬픔입니다.

슬픔의 위안 [수요일의 심리학] 10

© kyllik, 출처 Unsplash 본의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은 평범한 일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다.

▲슬픔의 위로 =p214 =한쪽 배우자가 죽으면 나머지 배우자에게 인생은 슬프게도 느껴지지만, 이상하게도 이전보다 자유롭게 느껴진다.

슬픔의 위안 p 242슬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심리적 혜택은 슬픔이 모호함을 이해시켜 삶의 진실이 절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개, 보통은 그 이상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바꿀 뿐 아니라 삶 자체의 이야기도 변화시킨다.

슬픔의 위로 p245 슬픔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야기이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인생이야기이다.

또한그사람과함께한자기인생에대한이야기이자그사람없이살아야하는자기인생에대한이야기이다.

슬픔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얘기다.

그러나 공저가 있다.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해방된 감정이 계속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익숙해져라.슬픔위안부 252편은 마지막으로 슬픔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슬픔을 통해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거칠어지게 되어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정말 슬퍼하지 않는 것 같아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요.

슬픔은 누구에게나 이런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슬픔에 대해 잘 몰라서 오해했던 겁니다.

슬픔의 한쪽 면만 보고 그것만이 슬픔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막상 슬픔을 마주하면 당황하고 낯선 감정에 당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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